안현정(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정은혜 작가는 선천적으로 다운증후군과 발달장애를 갖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 장애인 교육 시설 지원이 없어지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단절을 맞이했고, 퇴행이 오고 중복된 정신질환과 조현병, 틱 등이 생기면서 급기야 환시와 환청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그때 만난 그림과의 만남 다른 이들보다 늦은 23살 때의 일이다. 인기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2022년 tvN 방영)는 인생의 시작과 끝자락에 서 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옴니버스처럼 담아 “관계란 사랑이란 이름 속에서 완성된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정은혜 작가의 필모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서술되는 이 드라마는 실제 ‘선(線)으로 연결된 작가의 인물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을 준다. ‘은혜씨와 관계된 인생 그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옴니버스 드라마처럼 사랑을 담은 선적 에너지를 통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2023년 12월 뉴욕 전시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강아지 <지로>를 입체파와 같은 해체된 필선으로 묘사해 서구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단순한 강렬함’을 보여준다. 원근법을 상실한 ‘펼친 그림’은 평면성 속에서도 ‘옅은 색의 레이어(淡彩)’와 만나 다양한 감성을 드러낸다. 단순한 윤곽선을 섬세한 감성묘사로 연결하는 작가는 뛰어난 소묘실력을 갖춘 ‘한국의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라고 평할 만 하다. 아카데믹한 교육과 거리가 먼 작가는 23살인 2013년 우연히 광고모델 사진을 보고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다. 연필의 묘선(描線)을 통해 인물의 본질을 꿰뚫어 표현하는 재능은 동양화를 전공한 어머니와의 교감을 통해 적극적으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밑그림 없이 자유자재로 그리는 선적 작업은 ‘자기 안의 에너지’를 직관에 따라 표현하는 ‘천재적인 면모’이다. 어떤 계획도 없이 작가가 인식한 관계 설정에 따라 그림의 소재들은 ‘무계획의 계획’ 속에서 자연스러운 감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중략)
소통을 통한 큰 치유, 인물을 끌어안다.
학교 졸업후, 외부의 영향을 최소화한 채 자신 안에 독립돼 살아온 작가는 한때 조현병(調絃病, Schizophrenia)까지 앓았다. 특정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주변화하는 등 한국사회의 편견은 타인을 관찰하며 그려낸 ‘4500여 명의 인물 드로잉’을 통해 해소되었다. 정은혜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자세는 서로를 끌어안은 인물들이다. 디테일이나 기술보다 편견을 배제한 인물들은 몇 개의 선으로 연결됐음에도, 다양한 표정과 감성을 갖는다. 적어도 화가 정은혜에게 장애라는 선입견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은혜씨’로 전환되는 것 같다. 군산 이성당 달력그림 프로젝트와 서울대병원 굿즈제작을 시작으로 작품의 주제는 인물화에서 풍경화로까지 인식의 범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최근 성공은 국내 발달장애 작가들의 선구적인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세련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형태를 지닌 ‘원생미술(原生美術), 아르브뤼(Art Brut)’와는 또 다른 행보다. 북미나 유럽에는 발달장애 작가들을 위한 ‘미술장터’ 혹은 미술 전시가 활발한 데 비해, 국내에는 아직도 ‘장애/비장애’라는 인식 속에서 정상 범주의 예술이 아닌 ‘비주류의 방식’으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미술에 거의 영향받지 않은 정은혜 작가의 그림은 고도로 훈련된 전문화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솔직하고 창조적이다. 작가에게 장애는 ‘남다름 혹은 색다름’으로 평가되며, 의도적으로 순수로의 회귀를 꿈꾼 아르브뤼와 다른 예술적 성과를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세계’를 탐색하는 작가는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에너지를 통해 관계를 해석하고, 이를 ‘관계화된 선’으로 이어간다.
워킹하우스뉴욕과 함께 해외 진출 첫걸음을 위한 12월 뉴욕 첼시 갤러리 초대 기획전도 성황리에 열린다. 정은혜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 리코/마레스카(Ricco/Maresca)는 1979년에 창립한 40년 전통을 이어나가는 갤러리로, 뉴욕 첼시 아트 디스트릭트(529 West 20th Street)에 최초 입점된 갤러리 중 하나로, 아웃사이더 아트의 마스터 마틴 라미레즈(Martín Ramírez) 재단 독점권을 소유하고 있다. 리코/마레스카 디렉터 프랭크 마레스카(Frank Maresca)는 윌리엄 호킨스, 빌 트레일러, 헨리 다거 등 모마, 휘트니 뮤지엄에 소장되어있는 작가의 작품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리오폴드 스트로블(Leopold Strobl), 조지 와이드너(George Widener)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등극시킨 장본인이다. 워킹하우스뉴욕 수이강 대표는 “정은혜의 활발한 작가 활동을 지원하고 싶다. 작가와의 전속 계약을 통해 해외 진출의 기회 및 국내에서도 다양한 전시를 기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작가들의 다각적 행보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모범적인 사례로서, 이들이 국내 미술계에도 ‘장애작가’가 아닌 ‘창조적 아티스트’로서 읽힐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보여주고 있다.
- 정은혜 작가평론 중